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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egory: 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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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과 실재(이미지와 본질)라는 이분법에 대한 재정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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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김 시작|제목=들어가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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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이미지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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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실재가 닿을 수 없이 요원했고, 발 딛고 있는 곳에 이미지들이 있을 뿐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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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싶은 것은 본질이었다. 그러나 사물을 주의깊게 들여다 볼수록 핵심이 드러나기는 커녕 윤곽조차 흐릿해졌다... 자신 역시 마찬가지 였다... 나와 타자의 구분 역시 모호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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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비판해야 할 것은 손쉽게 사태를 주관화 하려는 종래의 관점**이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이기적 본성에서 추동된 것이며, 그것이 아무리 이타적 외양을 띌지라도 결국 모든 헌신은 자기애에 불과한 것이라 말하는 관점 말이다. 그런데 모든 행동과 선택의 중심으로 가정된 이 **내면적 자아**는 대체 무엇인가? 실은 모호하기 짝이 없는 내면이라는 관념에 너무 오랫동안 붙들려 있었던 것은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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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상의 시원<ref>시원: 始源, 사물이나 현상 따위가 시작되는 처음</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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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은 오히려 인간이 세계를 떠도는 이미지들을 만나면 그에 사로잡힌다는 사실로부터 설명되어야 한다. ...나 자신의 것이 아닌 슬픔을 모방하여 울음을 터트릴 때, 타자와의 거리는 사라지고 이미지와 실재는 교착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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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의 시원이자 친숙한 형태는 이런 경험들이 아닐까? 상상이란 지금의 나에게서 벗어나는 일이다. 나의 것이 아닌 역사 속에 나를 위치시키고 나의 것이 아닌 생각과 감정을 모방함으로써 타자가 되는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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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의 시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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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와 현실이 분간되기 어려운 현실을 우려한 이들은 현대인이 진정성이 결여된 가상에 현혹되어 점차 현실감각을 잃어버린다고 경고한다. 출처가 불분명한 알고리즘에 둘러싸인 현재이다.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소통과 교류가 편리해진 오늘날 사람들은 도리어 방안에 틀어박힌 채 유아론적인 세계에 빠져들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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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온라인 공간과 그 안의 디지털 **대상**을 '가상'이라고만 규정할 수 없다. 실재와 이미지가 서로 모방하고 영향을 주고받는 지금, 무엇이 무엇을 베꼈는지 알 수 없게 된 한에서 디지털 이미지는 가상이 아니라 실재의 또 다른 유형이다. 오늘날 대상은 사전적 정의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왜곡시키고 굴절시키는 이미지들을 통해서만 주어질 수 있다. 순수한 객관성도 주관성도 모두 허구, 즉 환상 혹은 신화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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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면의 신화를 넘어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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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르트르와 들뢰즈 모두 **내면성의 신화**를 넘어서려 했다. 둘의 공통점은 '전통 철학의 주체'(세계를 인식하고 판단하며 경험하는 중심으로서의 나) 관념을 비판하며 주체를 일종의 과정이자 운동으로 이해된다. 타자와 나는 안과 밖의 구분이 아닌 뒤섞여 있고 어딘가로 향하는 과정 중에 있는 과도기적 형식이다. 그러나 내면성을 비판한다는 것이 곧 주체 없는 실재를 논하려 하는 것이 아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실재와 이미지 사이의 균열이다. 내면의 신화만큼이나 경계해야 하는 것은 **배후 세계의 착각**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 뒤에 인간의 지각이나 관계와 완전히 무관한 ‘진짜 세계’가 따로 있다 역시 극단적 논리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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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의 신화와 배후 세계의 착각을 경계하는 가운데 실재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실재는 주관<ref>주관: 경험하고 지각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나의 의식적 관점</ref>과 동떨어져 있지 않으며 주관을 경유하여 성립한다. 이때의 실재는 나 혼자 만들어낸 것도 아니고 주관과 완전히 무관한 것도 아니다. 나와 타자들이 경험하고 관계 맺는 가운데 드러나는 세계를 의미한다. **실재는 타자와 더불어 형성된다.** 사변적<ref>사변적: 경험이나 실증적 증거에 의존하지 않는 오직 순수한 논리적 사고만으로 사물이나 현실을 인식하고 설명하는 것</ref> 형태의 개념적 사유가 완전한 지식이라고 여기고, 이미지를 열등한 것이라도 간주하는 선입견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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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의 철학 탐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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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데카르트<ref>데카르트: 1596~1650</ref>와 흄<ref>흄: 1711~1776</ref>의 철학을 통해 이미지가 가상이라는 생각이 어떻게 떠올랐으며 그 의미가 무엇인지 확인, 이 관념이 고대 플라톤주의로부터 유래한 것임을 밝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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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3부: 샤르트르<ref>사르트르: 1905~1980</ref>와 들뢰즈<ref>들뢰즈: 1925~1995</ref>의 철학을 통해 이미지를 보는 새로운 관점을 전개한다. 둘은 서로 다른 철학적 입장을 가지고 있지만 전통 철학의 이미지 관념을 비판하며 현대의 상황에서 이미지를 새롭게 규정한다. 들뢰즈에게 이미지는 그 무엇에 관한 모방이 아닌 '실재를 구성하는 블록'이며, 사르트르에게 이미지는 불완전하거나 거짓이 아니라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근본적 방식'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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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김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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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김 시작|제목=1부: 이미지에 대한 불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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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재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단지 실재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양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지란 무엇인가? 철학자들에 의한 이미지란 당신이 바라보는 바로 그 상(像)이다. 그것이 당신의 시선에 의해 포착된 세계의 단면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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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는 실재 대상을 인위적으로 재현한 그림이나 사진으로 제한되는 표현이 아닌 문자 그대로 우리가 바라보는 보는 것은 이미지다. 고전 철학자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가 이미지의 세계라고 규정해 왔고 우리는 이러한 이미지에 둘러 쌓여, 이 모든 것은 가상으로 이로부터 싹트는 것은 원본에 대한 욕망이라 말한다. 그런데 저자는 이미지와 실재의 구분에 대해 질문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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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장. 데카르트의 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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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의 철학은 모든 오류와 불확실성으로부터 벗어난 명석 판명한 지식에 대한 열망에서 시작한다. 모든 다른 지식의 바탕이 될 이 최초의 지식에 도달하기 위해 데카르트는 기존의 모든 지식을 의심했다. **저자의 초점은 데카르트적 성찰을 이끄는 방법인 '의심'이다. 왜 의심인가? 데카르트는 어떠한 선행된 지식에 의존하지 않은 최초의 지식을 찾으려는 방법 역시 정당화되지 않은 전제에 기초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이 방법으로서의 '의심' 역시 정당화되지 않은 오래된 선입견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선입견이 바로 이미지와 관련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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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류란 무엇인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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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데카르트가 철저하게 의심하며 피하고자 했던 오류가 무엇인가? 데카르트는 산술과 기하학만이 확실하고 의심할 수 없는 인식을 추구하는 학문이라 했다. 사물에 대한 인식에 도달하는 데는 경험과 연역<ref>연역: 이미 알고 있는 판단(전제)을 근거로 새로운 판단(결론)을 유도하는 과정. 연역은 전제가 참이면 결론이 '필연적'으로 참이 된다.</ref> 두 가지 방식이 있다. 경험은 종종 오류에 빠질 수 있다. 연역 역시 주의하지 않을 때 오류에 빠질 수 있지만 오성<ref>오성: 정신이 어떤 것을 명료하게 이해하고 참을 파악하는 지적 능력</ref>에 의해 혹은 이성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잘못될 수 없다. 데카르트는 오류가 연역이 아닌 경험에서만 발견된다고 말한다. 흥미로운 것은 오류가 경험에 관련되어 있지만 경험 그 자체가 오류의 원인이라고 하지 않는다. 경험을 통한 인식이 오류에 빠지는 이유는 그 경험을 섣불리 '판단'하기 때문이다. 오류란 주관의 경험 자체가 아니라, 주관의 경험과 객관적 실재가 잘못 짝지어질 때 발생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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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가 피하고자 하는 오류의 문제에서 암묵적으로 전제하는 데카르트의 선입견이 드러난다. 즉 '경험하는 것이란 실재와 유리된 이미지'라는 사고방식이다. 이러한 세계상은 그 자신에게 주어진 표상이 거짓일지 모른다는 우려에서 벗어날 수 없던 것이다. **데카르트의 의심은 곧 자신에게 주어진 이미지가 실재를 올바르게 재현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안에서 비롯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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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의 가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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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의 '지금 이것은 꿈이 아닌가"라는 물음에서 그의 선입견을 알 수 있다. 그는 의식에 주어지는 이미지와 의식 바깥의 실재를 분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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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는 꿈과 깨어있는 것을 구분할 징표가 없다고 한다. ... 이처럼 데카르트의 회의는 한낱 사변적 유희가 아니라 그 자신의 모든 믿음을 부정하는 고통스러운 과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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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코기토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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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는 문제가 되는 상황 자체를 수용하는 방식을 택했다. 데카르트는 모든 이미지가 공허하고 거짓으로 간주하며 자신의 내면으로 시선을 전환한다. 코기토 "나는 사유한다"라는 이러한 내면을 응시하는 가운데 발견한 이름이다. 모든 것에 속임을 당하더라도 속임을 당하는 '나'는 존재한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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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상상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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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는 모든 이미지는 늘 거짓일 수 있기에 지식을 추구할 때 원칙적으로 배제되어야 하지만, 코기토로 표현되는 나의 사유는 어떤 의심의 여지도 허용하지 않는 진실성을 담보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미지와 사유는 각 극단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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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상하게도 데카르트는 **이미지를 불신하지만 상상에 관해서는 긍정적 태도를 취한다**. 상상력이란 단어가 이미지와 어원이 비슷함을 보면 이상한 일이다. 이미지를 사유로부터 분리하는 동시에 '상상'을 사유에 포함하는 것은 모순 아닌가? **데카르트는 상상하는 활동 자체(사유)와 그에 의해 상상된 것(이미지)을 구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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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기토는 어떤 형식으로든 표현할 수 있다. 어떤 합리적 판단도 내릴 수 없을 만큼 강렬한 정념에 사로잡혀 있을 때조차 그러한 정념의 주체인 자아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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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상을 배제하는 사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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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는 순수사유 즉 **지성의 능력은 상상의 능력에 비해 우월한 것으로 이해한다**. 상상을 일종의 감각화된 사유 능력이라 본다. 상상이 왜 지성에 비해 열등한가? 상상력을 통해서는 '사유하는 것'인 나에 관한 앎을 얻을 수 없다. 천각형을 (정확하게) 상상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천각형을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상 능력의 한계를 증언하는 이 불완전성 내지 혹은 불충분성은 어디서 기인하는가? 이것은 감각 경험의 문제와 연관된다. 지성과 상상의 근본적인 차이란 바로 감각 경험에 대한 의존 여부라고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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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은 사변적 이해에 머물지 않고 경험을 참조하려는 정신 능력이며 추상적 관념을 감각적 표상으로 구체화 하려는 정신 능력이다. 데카르트는 감각을 통해 얻어진 인식을 신뢰할 수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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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의 빛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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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는 모든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지성이 있으며 이 지성만이 우리의 참된 인식을 추구할 때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자연의 빛이라 여겼다.** 그는 인간에게 주어진 두가지 본능으로 '자연의 빛'과 육체적 쾌락을 쫒는 '동물적 본능'을 말한다. 감각은 후자인 동물적 부분에 속한다. 감각에 의존해 획득한 지식은 자연의 빛이 아닌 충동으로 분류한다. ... **데카르트의 철학 자체는 진부한 것**이다. 스콜라 철학 전통을 전복하겠단 선언에도 결국 **전통 철학의 세계관을 옹호하는 결론**이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혁명적 측면은 결론이 아닌 **태도**에서 발견된다. **주관에게 명석 판명한 것으로 드러나기 전까지는 그 어떤 명제도 참된 것으로 신뢰하지 않겠다는 엄격함.** 데카르트에게서 탐구의 중심은 주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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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일'이라는 형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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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는 이미지와 상상력을 배제하고서 성찰하고 있는가? 그의 철학은 온전히 자연의 빛으로서의 지성을 통해 수립된 것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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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자연적 충동 없는 자연의 빛이라는 관념이 합리적 공상의 산물이라 비판한다. 칸트의 표현에 빌려 공기의 저항없는 비행기가 더 잘 날 것이라 생각하지만 공기가 없으면 결코 비행 할수 없는것 같다고 한다. **자연의 빛인 지성은 자연의 충동인 상상에 의존한다.** 데카르트의 모든 사유는 '만일 이것이 거짓이라면'이라는 의심으로부터 시작되었듯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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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장. 흄의 극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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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와 달리 흄은 인간의 본성을 탐구한다. 모든 학문이 다루는 갖가지 종류의 지식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본성과 함께 형성되기 때문이다. 흄은 인간이 이해력이 탐구할 수 있는 범위와 역량을 넘어서는 데카르트적 형이상학을 비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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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험이라는 방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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흄은 인간학이 다른 모든 학문으로 나아가기 위한 중심이라 한다. 그렇다면 만학의 토대가 될 인간학은 어쩐 방식으로 탐구되어야 하는가? **데카르트와 흄의 철학의 근본적 차이**는 이 **방법**에서 드러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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흄이 선택한 방법이란 경험, 그리고 경험된 사태에 대한 부단한 관찰이다. 인간 본성의 원리는 오직 **경험과 관찰**을 통해 탐구되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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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는 맹목적 탐구, 즉 경험론을 비판한다. 하지만 흄은 데카르트의 성찰이 참된 것이 아닌 승인할 수 없는 거짓된 직관과 기만이라 생각한다. 흄의 인간학은 오직 경험에 나타난 바에 기대 인간 본성의 원리들을 그려내려는 시도이며, 여기에 경험에 드러나지 않는 모든 관념(물체적 실체, 자아 등)과 법칙들은 원칙적으로 허위로 간주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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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에게 경험이 가상과 오류의 원천으로 간주되었다면 흄에게 경험은 참된 지식을 얻기 위해 의존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방법으로 이해된다. 그렇기에 흄은 자아라는 관념을 인정할 수 없다. 경험에 주어진 인상들 중에 지속성을 가진 나와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흄에게 확실한 것은 그 유래를 알수 없는 단속적인 지각들, 즉 정신의 극장을 떠도는 인상과 관념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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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카르트 대 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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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을 통해 관찰되지 않는 모든 것을 거부한 끝에 흄의 철학이 다다른 곳은 회의주의의 심연이었다. 흄은 인간들이 서로 다른 지각들의 다발 또는 집합이며 이 지각들은 표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서고 계기<ref>계기:사물의 운동, 변화, 발전의 과정을 결정하는 본질적인 요소</ref>하고 흐르며 운동한다. 사유는 시각보다 가변적이다.. 정신은 일종의 극장이다. '나'는 "지각들의 다발 또는 집합"일 뿐이다. '나'는 정신이라는 극장을 떠도는 수많은 지각들의 배후에 있는 실체가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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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는 '사유하는 나'가 사유하는 작용에 뒤따르는 것임을 시인하고 있다. 이와 달리 흄은 코기토가 정신 활동의 전제 조건이 아니라고 말한다. 코기토는 표상들, 흄의 표현을 따라 말하자면 '지각들'에 따라오는 허상에 불과한 것이다. 왜 허상인가? 이 관념에 상응하는 인상<ref>인상: 우리 마음이 경험할 때 가지는 가장 생생하고 강렬한 지각</ref>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관념이 경험으로부터 비롯된다면 인격적 동일성을 가진 나의 관념 역시 그에 상응하는 인상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인격적 동일성을 가진 나라는 관념에 대응하는 인상은 결코 경험에 주어지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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흄에게 정신이 일종의 극장이며 무수한 지각들이 이 극장에서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이라면 바로 이 극장이 '나'에 해당 하는것은 아닌가? 흄은 극장의 비유를 오해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단지 잇따른 지각들이 정신에 나타난다는 사실 그 이상의 어떤 함축도 의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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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상력 탐구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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흄은 정신에 관한 모든 종류의 임의적 설명을 거부한다. 그의 인간학에서 발견되는 것은 극장에 떠도는 이미지들 뿐이다. 이미지들은 연합되어 다양한 종류의 관념을 형성한다. 연합을 인도하는 것은 지성이 아닌 상상력이다. 상상력은 경험(과거 대상들의 여러가지 결부들에서 나를 가르치는 원리)과 습관(내가 미래에도 동일한 것을 기대하도록 결정하는 또 다른 원리)에 뿌리를 둔 능력으로 규정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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흄은 기존 철학이 섣불리 본유<ref>본유: 본래 타고난 성질이나 가치</ref>적인 것이라 받아들인 관념들의 원천에 상상력이 있음을 폭로한다. 이러한 상상력은 경험과 습관에 의해 인도된다는 점이다. 흄이 정신의 역량으로 제시하는 기억력과 상상력은 바로 이미지들을 불러오고 연합하는 힘의 이름인 것이다. 흄은 지성이 더이상 인간에게 본유적으로 내재하는 능력이 아니라 한다. 인간의 이성은 과거 발생한 사건들에 대한 관찰과 경험에서 발생하는 것이지 그와 다른 원천을 가지지 않는다. 이렇게 이성의 능력을 경험에 기반한 '직감'과 같은 것으로 이해함으로써 흄은 데카르트적 논변의 근본 전제인 '자연의 빛'과 '자연의 충동'의 구분을 와해시킨다. ... 흄은 지성이 경험에 앞서는 것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흄은 이미지들이 어떻게 연합되는지를 기술한다. 흄의 인간학은 이미지들이 연합하는 원리와 규칙에 관한 탐구, 곧 상상력에 관한 탐구가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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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상의 두 의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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흄의 철학은 상상력이라는 개념을 다의적으로 사용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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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상상력을 이성과 대비 시킬 때, 상상력은 지성의 모태가 되는 역량으로 기술된다. 특정한 방향으로 고착되지 않은 무정형의 힘이 상상력을 이성과 대비시킬때 경험(과거로부터 배움을 얻는 원리)과 습관(미래에도 동일한 것을 기대하게끔 하는 원리)에 따라 작동한다. 모든 정신 능력은 이 상상력에서 유래하며 지성 또한 "상상력의 일반적이고 더욱더 확정적인 속성들"에 속한다. 상상력은 이성과 동일한 직능인 것이다. 지성이란 본유적으로 주어진 능력이 아니라, 상상력이 특정한 방향과 형태로 고착화된 결과일 따름이다. ...정신은 어떻게 하나의 주체가 되는가? 상상력은 어떻게 하나의 인식 능력이 되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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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상상력을 기억력과 대비 시킬 때, 상상력은 인상을 불완전한 방식으로 재생하는 능력으로 규정한다. 상상과 기억을 구분 짓는 핵심적 차이는 그것이 불러오는 지각의 생생함이다. 상상은 희미하고 생생하지 못한 방식으로 인상을 불러오는 능력이다. 그리고 상상으로 불러오는 것은 생동성이 완전히 상실된 인상으로서 완전 관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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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처럼 생생함을 기준으로 인상과 관념을 구분할 때 상상과 기억이라는 능력 사이의 구분이 불명확해 진다. 이때 데카르트의 문제가 발견된다. 데카르트가 꿈이 현실의 지각만큼이나 생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면, 흄은 기억이 상상만큼이나 희미해질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동일한 문제가 현실과 꿈 기억과 상상이라는 구도로 반복되고 있다. 흄은 데카르트의 철학과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다. 핵심은 세계에 대한 경험이 이미지를 매개로 이루어진다는 생각이다. 우리는 세계와 직접적으로 마주하지 않는다. 지각과 상상을 혼동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대면하는 것이 실재가 아닌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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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아론의 문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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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여기에 유아론<ref>유아론: 唯我論, Solipsism 세계에 오직 자신만이 실재하며, 타인이나 외부 세계는 자신의 의식과 감각이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하다는 의미</ref>의 기원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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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은 일종의 극장이고 우리는 극장의 이미지를 보는 관객이다. 이 극장의 이미지가 아무리 생생해도 그것이 극장 밖의 실재를 올바르게 재현한 것인지 아닌지 가늠할 길이 없다. 극장 밖을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유아론적 사유는 여기서 싹튼다. 고립된 세계에 갖힌 자아는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 외에 부정하기 이른다. 본적 없는 실재를 부정하고 주관에 주어진 표상들만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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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의식에 주어지는 표상들, 곧 이미지들만이 경험 가능한 것이라면, 그와 분리되어 있으나 그 원천이라 가정되는 실재를 확증할 수 있을까? 이에 부정적으로 답하면서 의식과 의식에 주어지는 표상만이 있다고 결론짓는 **주관적 관념론**에 다다르게 되는 것은 특별히 불합리한 사고에 의한 것이 아니다. 유아론은 실재로부터 그것의 모사물인 이미지를 구분하고 우리가 바라보는 모든 것이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다고 간주한 근대 철학이 다다른 필연적 귀결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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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론자들의 세계에서도 충격이 찾아올 때가 있다. 나의 세계와 너무나도 다른 타인의 세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자각이다. .. 그러나 차이나 동일성도 셜코 유아론적 세계를 훼손시키지 못한다. 타인의 세계도 역시 쉽게 나의 세계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와 흄 모두 우리가 우리가 세계를 대면할 때 마주하는 것이 실재로서의 세계 자체가 아니라 주관에 주어진 표상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같은 표상주의적 사고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 지각과 상상의 혼동이라는 문제이다. 우리에게 실재가 단지 주관적 표상의 형태로 주어진다면, 실재에 대한 지각과 비실재에 대한 상상을 구분할 어떤 분명한 기준도 결코 찾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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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이미지 탐구의 여정에서 우리가 발견한 것은 이 표상주의적 사유의 핵심이 이미지에 대한 부정적 관념이라는 사실이다. 이 관념은 데카르트와 흄이 창안했다기 보다는 **내면화**했을 뿐이다. 이미지가 대상에 관한 참된 인식을 가로막은 가상이자 오류의 원천이라는 관념은 근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철학의 기원인 기원전 고대 그리스로 가 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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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장. 플라톤의 동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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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철학의 경험론(흄)과 합리론(데카르트)에서 공통으로 이미지에 대한 부정적 선입견이 발견된다. 전통적인 철학적 개념을 통해 말하자면 '오표상<ref>오표상: 심리학, 인지과학, 철학에서 어떤 심적 상태나 표상 장치가 외부 대상이나 사태를 잘못 지향하거나 잘못 나타내는 현상</ref>의 문제. 즉 실재와 이미지의 관계에서 이미지가 대상을 잘못 나타낼 수 있다'라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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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된 표상으로부터 참된 상을 구별하기 위한 방법으로 데카르트와 흄은 표상의 힘과 생생함에 주목했다. 흄은 상상의 관념과 기억의 관념이 힘과 생동성의 측면에서 차이가 나며, 이것 이외에 양자를 구별할 수 있는 어떤 방법도 없다고 말한다. 흄이 강조하는 것은 생생함이라는 이 모호한 특성이 기억과 상상을 구분 짓는 데 결코 적절한 기준이 될 수 없음에도 '생생함 이외에 의존할 수 있는 어떤 방법도 없다'는 사실이다. 흄이 회의주의적 결론으로 나아간 것은 바로 이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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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올바른 표상과 거짓된 표상을 구별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가? 이에 답하기 앞서 우리의 탐구 주제인 이미지가 비단 표상의 문제에 제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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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라튈로스 찾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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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대화편 중 『크라튀로스』 부제 '이름의 올바름에 관하여'는 언어의 문제를 다룬, 이름이 사물에 대해 '모방'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다. 인용된 구절에서 소크라테스는 '크라튈로스와 크라튈로스의 이미지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 흥미롭게도 플라톤이 이미지의 정의를 이끌어 내는 것은 이 물음을 통해서이다. 실제과 이미지가 구분되기 위해 둘 사이에는 차이가 있어야 한다. 이미지가 이미지로 규정되는 것은 그것의 기준이 되는 원본에 미치지 못하는 것인 한에서이다. 이미지가 원본의 '불완전한 모사물'이기 가짜와 진짜는 구분이 된다. 그렇다면 원본과 가상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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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에 비친 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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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김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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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김 시작|제목=2부: 이미지는 자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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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장: 사르트르의 이미지철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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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는 최초로 '이미지'를 주제로 한 철학적 탐구를 수행하는 가운데, 플라톤 이래 전통 철학이 무비판적으로 답습해 온 가상으로서의 이미지 관념에 문제를 제기했다. 왜 우리가 대면하는 것은 실재가 아니라 그것의 그림자인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세계와 구분되는 참된 세계가 있다고 여겨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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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를 추동한 것은 **내면을 벗어나야 한다**는 문제의식이다. 기존 철학은 의식을 일종의 공간으로 이해했고 그러한 의식 내에 온갖 표상들과 관념들을 집어넣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나'라는 관념이다. 최초의 저작 『자아의 초월성』에서 '나'가 의식 안에 있지 않으며 세계의 다른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의식 밖에 곧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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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식의 지향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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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들은 오랫동안 이미지를 의식 내에 위치한 외부 대상의 모사물 같은 것으로 간주해왔다. 그러나 이미지는 의식의 '대상'이 아니라 의식의 **활동**이다. 사르트르의 이미지 이론의 핵심을 이루는 이 주장은 후설 철학<ref>후설 철학: 후설(1859~1958)은 의식이 언제나 '무엇에 대한 의식'이며 내부에 이미지를 쌓아두는 창고가 아니라고 보았다</ref>을 바탕으로 이해 되어야 한다. 사르트르가 후설 현상학에서 주목한 것은 무엇보다도 의식의 지향성이라는 관념이다. 철학적 과제와 대결했던 후설은 모든 지향적 체험은 자신의 지향적 객체를 가진다고 말한다. 사르트르는 이를 모두 "모든 의식은 무엇에 관한 의식이다"라는 문장으로 정식화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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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철학은 우리가 대상 그 자체를 경험할 수 없으며,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오직 대상으로부터 유래한 표상들일 뿐이라 말해 왔다. 그런데 의식의 본성이 지향성이라면, 의식은 자신의 바깥에 있는 대상과 직접 관계하는 것이 된다. 이제 의식은 어떤 매개도 경유하지 않는다. 표상으로서의 이미지란 불필요한 고안물일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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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는 후설 현상학의 근본 전제인 의식의 지향성에 착안하여 자신의 독창적 이미지 이론을 수립한다. 그렇다면 이때 의식이란 폐쇄적인 내면, 유아론적인 자아와는 어떻게 다를까? 사르트르는 다음과 같이 후설을 비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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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그림, 두 가지 의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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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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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